자살로 생마감한 최진영, 남겨진 아이들과 어머니는 어떡하라고

직장생활을 하며 하나의 취미이자 자기계발의 툴로 블로그를 하고 있는 제겐 이제 블로그를 제외한 저의 하루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네요. 새벽 5시에 일어나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퇴근 후 집에 도착한 후에도 머릿속 한 켠에는 '글 쓰고 싶다' '블로그 업데이트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꾸물꾸물 떠오르니 말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글을 업데이트하고 관리하려고 하니 결코 만만치 않더군요. (그런 점에서 매일 바쁜 생활 와중에서도 꾸준하게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관리하시는 분들을 마주할 때면 상당히 존경스럽습니다.)

제게는 오랫동안 꼭꼭 숨겨둔 저만의 글이 있습니다. 검정색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되어 있는, 한참 힘든 시기에 혼자 울면서 썼던 글인데요. (언제쯤 다시 이 파일을 열어 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그야말로 '죽을 만큼 힘들다' 라는 생각이 툭하면 떠오르던 시기였던 지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울고 또 울며 썼던 글이네요. 글을 쓰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언젠가, 이 힘든 시기를 지나 이 날을 추억할 수 있는 때가 분명히 올 거라고 말이죠.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때에 비해 지금은 너무나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합니다. 또한 이전엔 조그만 힘든 일이 생겨도 힘겨워 하곤 했는데 그 힘든 시기를 지나고 나니 웬만큼 힘든 일이 있어도 그저 한번 씨익-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 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죽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상처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요?

슬픔, 고통 그러한 아픔 하나 없이 담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저 또한 한 때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한 사람입니다. 헌데, 지금은?

"야야, 내가 죽으면 그건 무조건 타살이야. 꼭 범인 밝혀내야 돼. 알았지? 자살이라며 그냥 수사 종결 지으면 안돼."

이와 같은 진담을 농담인 척 하며 친구들과 주고 받습니다. 최진영씨의 사망 소식을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되었고 관련 기사를 1보로 접했을 때, 오보이길 바랬습니다. 이미 세상을 뜬 최진영씨에 대한 안타까움도 컸지만 전 오히려 그보다 최진실-최진영의 어머니와 두 자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훨씬 컸습니다.

왜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의 그러한 힘든 심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래도-' 라는 생각이 한참을 머무는 것은...


퇴근길, 바로 뒷편에 앉으신 한 남성분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최진영 사망 소식 들었어? 정말 충격적이야. 넌 절대 죽지마" 라는 웃으며 내뱉는 것을 보니 갑작스런 최진영 사망 소식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와닿네요.

제가 이 글을 송고할 쯤. 발인이 시작되겠네요. 31일 오전 7시부터 발인 예정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최진영씨 미니홈피 : http://www.cyworld.com/02tiffany

여섯 살 당시, “친구의 처참하게 죽은 모습과 뇌를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가끔씩 농담 삼아 넌 애기였을 때부터 간덩이가 부었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다섯 살 때 처음으로 부모님의 손을 잡고 귀신의 집을 들어섰다고 합니다. 아이가 혹시 놀라거나 울까 봐 손을 꼭 잡고 들어섰는데, 놀라거나 울기는커녕 웃으며 좋아했다고 하네요. (=.= …)

여섯 살 때 이런 저의 간덩이를 더욱 크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요. 유치원을 마치고 유치원 통원버스(현재의 시내버스 만한 크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한 명 씩, 한 명 씩 해당 아이의 집 인근에 내려주죠) 버스가 이윽고 한 아이의 집 인근에 도착하여 버스의 뒷문이 열렸고, 뒷문에서 내리려고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어머니가 마중 나온 모습을 보고 웃으며 내리려던 순간, 버스가 뒤로 급 후진을 하면서 그 큰 뒷바퀴에 아이가 깔려 죽는 잔인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사진과 사건은 무관합니다



당시 모습은 지금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생생한데, 당시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뇌가 저렇게 생겼구나. 근데 피가 왜 까맣지? 차가 뒤로 움직였을 뿐인데 친구가 왜 다쳤지?” 라는 궁금증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가 다쳤다고는 인지했지만, 친구가 죽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 합니다. 구급차가 왔으니, 병원으로 가서 치료 받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죽음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친구가 내리던 뒷문의 바로 뒷좌석이었던데다 사고가 발생한 해당 지점의 창가 쪽에 앉아 있었던 지라 그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차량에 탑승한 유치원생들이 아닌, 유치원 선생님과 조교 선생님들의 울음소리라는 것입니다. 곧이어 경찰차를 비롯하여 구급차가 도착했고, 운전기사는 경찰차의 질문에 몇 번 답변을 하는 듯 하더니 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습니다. 그 이후의 정황은 잘 모르겠네요.

일명 봉고차라고 하는 작은 사이즈의 유치원 차량이 와 사고 차량에 탑승하고 있었던 저를 비롯한 유치원생들이 그쪽으로 옮겨 탔고 집으로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해당 사진과 사건은 무관합니다


당시 사고 소식이 인근 지역에 크게 입 소문이 나 당시 사고를 목격한 유치원생들의 학부모들이 상당히 놀란데다 혹여 목격한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는 듯 했습니다
. (충분히 그럴 만 하죠) 어머니도 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무섭지 않냐고 물으시며 괜찮다고 한참 동안을 안아 주셨습니다. 정작 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어머니가 오히려 더 놀라신 듯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만 하죠)

당시 버스에 타고 있었던 유치원생(최하 5살에서 7살까지)들은 그 낯선 상황을 파악하기도 힘들었고 죽음에 대한 인식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었기에 그 충격은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충격보다 약한 듯 합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 충격은 약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오히려 당시 차량에 탑승했던 유치원선생님과 조교선생님 사고가해자로 볼 수 있는 운전기사가 그 몇 배의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네요.

성인이 된 지금, 그러한 상황을 목격한다면 단순히 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몇 십 년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무서워했을지도 모르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그 공포를 알고 있으니 말이죠.

이 사고는 어릴 적 당시 저에게는 무서운 경험이라기 보다는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된 듯 합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거나 내릴 때 문 가까이 밀착해서 서는 것을 꺼려하는데, 아무래도 어렸을 적의 경험으로 그 위험성을 깨달았기에 더욱 조심하는 듯 합니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거나 내릴 때 황급히 타거나 황급히 내리는 손님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빨리빨리문화 속 폐해라고나 할까요. 어떤 때는 정말 그런 몇몇 분들을 붙잡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님아- 좀 천천히 내리세요) 보는 제가 다 조마조마 하더군요. 특히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버스 계단을 부랴부랴 뛰다시피 내리시는 분들과 친구들과 장난치느라 정신 없어 하며 급하게 내리는 꼬마 친구들 말이죠.

당시 정황을 다시 생각해 보면, 유치원 그 아이가 그 큰 버스의 뒷문에 서 있다가 뒷문이 열리자 냉큼 뛰어 내렸는데, (아마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버스에서 더욱 빨리 내리고 싶어서 였겠죠-) 버스가 갑자기 뒤로 급 후진이 되면서 (. 평지였는데 왜 갑자기 후진이 된 걸까요?) 차 바퀴에 아이의 발부터 순차적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순식간에 사고가 난 듯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차나 지하철의 문이 열렸다고 황급히 내리려 하지 말고 한 템포 쉬고 내리는 것, 어렵지 않잖아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서 행동합시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다) 너무나도 예쁘고 귀여운 천사 같은 사랑스러운 아들, 딸이 있다면 꼭 한번 더 차나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조심할 수 있도록 이야기 건네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덧붙임 )

전 제 자식을 낳으면 제일 먼저 차 조심을 강조하며 차를 타고 내릴 때도 조심하라고 할 거예요-


"그 남자와 재혼하면 너가 죽어-" 사주를 믿으시나요?

사주를 믿으시나요?
혹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믿으시나요
?

Blackfield
Blackfield by photographer padawan *(xava du)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전 사주를 믿지 않았습니다-“ 라고 표현해야 할지, “믿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해야 할지,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 애매한 경계선을 뭐라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이혼은 하나의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새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저 이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왔습니다. 열 세 살의 어린 나이에 겪은 일이었기에 부모님의 이혼은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솔직히 이혼에 대한 충격보다 이혼을 하는 과정 속의 고통이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잦은 싸움은 자식 된 입장에선 더욱 애가 타거든요. 무척이나 조용하고 소심했던 성격이었기에 두 분의 싸움의 중간에 서서 말리지 못했던 과거의 제 자신에게도 무척이나 후회를 하곤 했습니다.

법원 판결에 따라 양육권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따라 새엄마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처음에는 새 집, 새 책상, 새 침대, 모든 것들이 좋기만 하더군요. (철이 너무 없었나 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는 날이 많아졌고, 새엄마의 이런 저런 요구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 견디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엄마가 동생과 저를 불러 앉히고선 말씀하시더군요.

너희 둘 입장에선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갈라 놓은 여자로만 느껴질 테니, 나에게 정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 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입장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말씀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 새엄마의 어머니(새외할머니라고 해야 하나요)가 아버지와 새엄마의 사주를 보고 돌아오시면서 (새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도 재혼을 꼭 해야겠냐는 말을 하셨다고 하네요.

솔직히 전 사주를 믿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 인생이며,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깊습니다. 새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생활을 해 오다가 결국 새엄마의 이런저런 요구에 이기지 못해 동생과 저는 그 집을 나와 친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단칸방에서 생활하고 계셨던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 어떤 때보다 따뜻하고 포근했습니다.

새엄마는 지금 이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한낮의 교통사고로, 한편의 드라마처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네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했던 그 마음. 결국 이렇게 끝나버리네요.

사주를 믿으시나요?

사주카페
사주카페 by michael-kay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전 기독교이기 때문에 사주는 믿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기엔 새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인지 더욱 뭔가 응어리 지는 기분입니다. 이미 6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새엄마의 잦은 모욕과 친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그 상황 속에서 그저 평범하게 자라고 싶었던 조그만 여자아이로서, 한 딸로서 많이 힘들어 하고 아파했었습니다. 차라리 엇나갈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었죠.

시간이 흘러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이 과거가, 한 때는 무척이나 쓰라린 고통이었고 눈물이었습니다. 요즘 너무 힘들다며 사주나 보러가자고 이야기 하는 친구를 마주하고 나니 이런 글을 쓰게 되네요.  

사주가 맞다- 그르다-“ 를 떠나 현 주어진 상황을 즐기고 사랑하세요.

힘드신가요? 웃으세요- 앞으로의 일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보물공개] 여러분은 본인의 가장 힘든 때를 기억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본인의 가장 힘든 때를 기억 하고 있습니까?

그저 주저 앉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런 때 말이죠. 저 또한 !’ 하고 놀랄만한, 그러한 일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이 한 면에 소개 하기엔 그 양이 너무 많으니 짧게 토막 내어 소개 할게요.

열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은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들었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힘들다, 죽고 싶다를 연발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너가 정말 그랬냐고 되물을지도 모르지요.

judge me now,   #2 in explore
judge me now, #2 in explore by ashley ros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양육권 판결에 따라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과 저는 당시 생활 여력이 더 높았던 아버지를 따라 나서야 했습니다.
새 집, 새 책상, 새 침대모든 것이 낯선 와중에 만난 첫 날부터 엄마라고 부르라고 강요하는 새 엄마까지. 드라마 속, 만화 속 계모를 제대로 체감하였습니다.

너무나도 큰 아파트, 좋은 컴퓨터, 새 책상, 새 침대, 처음엔 꿈만 같았던 그 상황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질 없는 것이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그 어린 나이에 다시 고민에 빠졌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를 다 꺼내려면 너무 길어지니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End of summer / Fin del verano
End of summer / Fin del verano by Claudio.A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러한 새로운 환경과 새 엄마의 구박 속에 견디다 못해 2년 여 정도 버티다 곧바로 홀로 힘들게 생활하고 계셨던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양육권이니 그러한 법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와 새 엄마에게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당시 고3.

my desk corner 2
my desk corner 2 by Laurie :: Liquid Paper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한창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시기에 심적인 불안감과 부담감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단칸방에서 힘겹게 공부하며,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밖으로 나가야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제 자신을 믿고 응원해 준 동생과 어머니가 계셨기에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공장을 다니며 힘겹게 돈을 모아 생계비며, 집 월세며, 동생과 저의 학비 부담까지. 3이었던 터라 교재비도 상당했죠. 단순히 큰 딸, 장녀로서가 아닌 생계를 책임지고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커갔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 공장일을 하시다가 몸이 많이 나빠지셔서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학업에도 신경 써야 했지만 생활비와 학비에 대한 부담감에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보시기에 착하고 예쁜 딸이기 보다는 강하고 든든한 아들로 보이기를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9년이 거의 다 되어 가는 한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채찍질 하기 위해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죠.

바로 2002학년도 당시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표와 수능 전 날, 저에게 건네주었던 동생의 편지입니다.



지금도 이 껌이 나오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당시 열 세 살이었던 어린 동생은 본인이 먹고 싶었을 텐데 꾹 참고 아껴서 저에게 건네준 풍선껌인 듯 합니다.



제 지금 나이 스물일곱.

제 자신에게 이야기 하곤 합니다. “참 잘 컸다- 수고했어-“라고 말이죠.

비록 화목한 가정 속에서 때론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리고 가족 여행을 가고 싶은, 그런 마음도 컸었고 난 왜 그런 평범한 가정 속에서 자라나지 못했을까, 라는 현 상황을 낙담해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악물고 버텼었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라는 것과 수능을 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어른이 되면 어머니께도, 동생에게도 보다 떳떳한 딸이, 언니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의 결과는 어떠했느냐고 묻는다면, 특히 나와 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 자칫 잘못된 길을 선택하려는 후배나 어린 동생들이 있다면 붙잡아 주고 싶어요. 자신을 믿고 노력하면 절대 그 노력은 너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서울에 위치한 4년제 대학교에 합격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홀로 올라와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지방에 있는 동생과 어머니를 위해 틈틈이 아르바이트, 과외, 교수님을 도와 프로젝트를 하는 등 여러 사회생활을 겸하며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졸업 하기 전에 운 좋게 바로 취직하여 지금은 동생과 어머니도 서울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 보물입니다.


가장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이를 악물고 버티게 해 준 동생의 편지와 당시 수험표를 작성하며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바라는 마음이 컸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납니다. 그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 저의 보물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끔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꺼내서 보곤 합니다.

일찍 어른이 된 만큼, 분명 보다 큰 기회가, 큰 행복이 찾아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