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내게 각서를 내민 이유

 

책상 정리를 하다 2009년 7월, 남자친구가 제게 준 종이 한 장이 발견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반듯하게 잘 접혀 있어서 가히 '그것'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종이를 펼치는 순간 또렷하게 쓰여져 있는 '각서'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당시의 일이 생각나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남자친구가 제게 건넨 '각서'더군요.

 

3년이나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당시의 각서를 발견하게 될 줄은…

 

"어디 보는 거야?"
"아… 아니."
"왜? 뭔데? 설마 강아지?"
"응. 귀엽지? 너무 예쁘지?"
"강아지 좋아하는구나?"
"응."
"이미 집에 키우고 있지 않아?"
"응. 키우고 있지. 저것 봐. 꼬물꼬물. 귀엽지?"
"아, 난 개 털 알레르기 때문에 개를 별로 안좋아해."
"음... 귀여운데..."
 -.-

 

남자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 창 너머로 꼬물꼬물 거리는 강아지에 시선이 뺏겨선 한참을 남자친구와 보고 있었습니다. 아, 정확히는 제가 보고 있었고 남자친구는 기다려 준거죠.

 

동물을 무척 좋아하다 보니 길을 가다 마주치는 동물이라면 늘 시선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길게는 30분 가량 쇼윈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

 

대학생 때부터 꼭 갖고 싶었던 DSLR. 똑딱이 디카만 사용하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DSLR을 구입하고선 신이 나서 늘 소지하고 다니며 이런 저런 사물과 풍경을 찍기에 바빴습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도 DSLR을 항상 소지하고 나갈 정도였으니 말이죠.

 

"내 말 듣고 있어?"
"응? 아, 미안. 뭐라고 했지?"
"사진 찍는 게 그렇게 좋아?"
"아, 오빠도 같이 찍자. 오빠도 작품 하나 남겨봐."
"...아, 난 사진 찍는 거 별로."
"왜? 사진 찍는거 재미있는데..." -.-

 

함께 데이트를 하다가도 '이거 예쁜데?' 싶으면 카메라부터 꺼내 사진 찍기 바빴습니다.

 

여자친구인 내가 좋아하니, 남자친구도 좋아할거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아니, 남자친구가 설사 좋아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싫어하진 않을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

 

당시 4년 가까이 연애를 하며,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도 좋아할거라는 제 멋대로의 '추측'에 '확신'까지 더해졌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종이 한 장을 내밀더군요. 편지인 줄 알고 펼쳤다가 예상치 못한 '각서'라는 글귀 하나에 깜짝 놀랬습니다. 내용은 데이트를 하며, 제가 사진을 찍건, 좋아하는 다른 뭔가에 몰두해 있건 간에 그것에 대해 일체 터치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각서를 보는 순간 마음이 '쿵'하더군요.

 

순간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화를 내려다가도 그 동안 공공연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좋아하라고 강요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연애를 하며, 난 좋아하지만, 상대방은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되고 반대로 상대방은 좋아하지만 나는 싫어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만약 남자친구가 '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지 몰라도 난 사진 찍는 거 싫어. 그리고 데이트 하는데 꼭 그렇게 사진을 찍어야 되니?' '넌 옆에 내가 뻔히 있는데도 강아지만 보고 있네.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니?' '넌 왜 너만 생각하니? 내 입장은 생각 안해?' 라는 식으로 말을 건넸다면 싸움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 속 좁은 여자니까요... 쿨럭;)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에 남자친구가 건넨 '각서' 한 장으로 상황은 역전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한 발 양보하겠다고 '각서'를 건넨 남자친구이건만 남자친구의 그 행동 때문에 되려 제가 한 발 물러서게 되더군요.

 

남자친구의 각서 사건 이후론, '애인이니(남자친구니까) 당연히...' 라는 생각을 버리게 된 것 같아요.

 

 

 

+ 덧) '부모니까 당연히...' '선생이니 당연히...' '애인이니 당연히...'

그러고 보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죠?

 

남자친구가 고마울 수 밖에 없는 이유

* 일기 형식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인지, 혹은 내 나이 어떤 시점을 지나면서부터인지.

다만, 분명한 것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 지어 '남자는 어떠하다…' '여자는 어떠하다…' 와 같은 말에 언제부턴가 더 이상 공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꽤 분위기 있어 보이는 사진에 '여자는 말이야' 혹은 '남자는 다 그래' 와 같은 류의 그럴싸한 여자, 남자 운운하는 글을 보고 맞아, 맞아, 하며 끄덕이기도 하고 쫓아 다녔던 내가 말이다.  

'남자'가 문제가 아니다. '여자'가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문제일 뿐. 개개인의 문제일 뿐.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과 황홀함이 가득한 문구들을 쫓던 내가 20대가 되어 연애를 하게 되었을 때, 그 연애는 순탄치 않았다. 당시 연애를 하면서도 난 지금 당장 이 남자와 헤어지더라도 아쉬울 건 없다는 나름의 자만심을 가지고 연애를 했었는지도 모른다. 데이트를 하면서도 만나거나 연락을 함에 있어서도 늘 계산적이었다. 밀고 당기기랍시고, 상대가 밀면 난 더 거세게 밀며 나를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첫 연애를 실패한 후엔 친구들을 만날 때면 그 남자를 욕하기에 바빴다. "역시. 남자는 다 그래. 왜 그런지 몰라. 남자는 역시 못믿겠어!" 내가 만난 남자가 이 세상의 모든 남자를 대표하기라도 하는 듯, 남자는 다 그래… 라고.

하지만,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고 나서 나의 이 작고 짧은, 편협한 생각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분명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도 크게 존재하고 있고, 내가 만나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간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작은 세상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힘겨워 했는지 지금의 남자친구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낀다. 여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남자' 이기 이전에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나를 먼저 걱정하고 챙겨주는 남자친구를 통해 '배려'라는 것을 배우고, '사랑'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니, 지금도 배우고 있다.

단순히 서로의 좋아하는 감정을 확인하고 채워 나가는 것이 연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당신에게 연애가 뭡니까?'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대답해 주고 싶다.
지금껏 내가 가진 하나의 눈으로 보던 세상. 이 하나의 눈으로 보지 못했던 세상까지 볼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더 큰 눈을 더 가지게 되는 것이 연애이고, 사랑이라고. 물론, 갖게 되는 다른 하나의 눈은 기존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의 눈과 보는 시야나 높낮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왜? 각자 살아오며 봐온 것이 다르고, 겪어온 것이 다르니 당연히 다를 수 밖에... 

다만, 그 눈높이와 시야를 잘 조절하고 맞춰 나가는 것이 나와 그가 할 일이다. 그럼 더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다. 희미했던 목표가 더 선명해 지고, 불투명했던 미래가 더 밝아 지는 듯 하다.
지극히 하나의 편견에 빠져 허덕이던 내가, 지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던 내가, 한 사람이 보여준 진심어린 사랑 앞에서 변했다.

"남자는 말이야" "여자는 말이야" 운운했던 내가 이젠 더 이상 '남자 VS 여자'가 아닌, '그 남자(남자친구)와 그 여자(나)'를 말하고 있다.

내 사랑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단순히 날 사랑해줘서? 아니.
내가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줘서.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고마워. 사랑해. 앞으로도 예쁘게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