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똑순이, 남자친구 앞에선 어리버리

집안에서 맏이로 커 오면서 늘 '책임감'과 '독립심' 이라는 무게에 눌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뭔가를 하나 결정하고 행동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고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런 저를 향해 의외로 '상당히 꼼꼼하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똑부러진다' '리더십 있다' 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순식간에 자기자랑 하고 있는 듯한 이 기분은 뭐죠? +_+ 뭐, 제가 하고픈 말의 요는 이 것이 아니니, 참아 주세요.)

그런 말을 또 많이 듣다 보니 더 의식적으로 꼼꼼하게, 흐트러짐 없이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학급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고 성인이 되어 지금 5년 째 맡아 하고 있는 제 업무도 가만 보면 그런 저의 성격이나 지금까지의 생활과 맞닿아 있는 듯 합니다.

@홍대에 위치한 GOEN

어딘가로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낯선 길을 거닐게 되면 늘 제가 먼저 여행지 정보를 입수하고 낯선 길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것도 저의 역할이었고, "뭘 할까?" 라며 서로에게 묻는 친구들 사이에서 의견을 수렴해 최종결정을 하는 것도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름 꼼꼼하고 나름 똑똑하게 행동한다고 하는 저인데도 유독 한 사람 앞에만 서면 그런 제 모습이 사라지는 듯 합니다.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누군지는 말 안해도 잘 아실 것 같은데 말이죠)

'지혜로운 여자'가 이상형이었다며 절 보며 '넌 지혜로워. 현명해.' 라고 이야기 해 주는 남자친구가 무척이나 고맙습니다만, 제 스스로가 생각할 때는 너무 민망하기 짝이 없다 싶을 만큼 남자친구 앞에서는 어리버리 소녀가 되어 버리는 듯 합니다. 지혜롭기는 무슨, 현명하기는 무슨, 완전 어리버리 -_-

결정적인 해프닝 중 하나가 이사 준비를 하며 이사할 집을 못찾아 어리버리하게 헤매는 아주 황당한 상황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집 주소는 알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큰 차량이 들어갈 수 있는 골목으로 돌아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야 하는데 제가 집을 눈 앞에 두고 길을 못찾아 한참 헤매고 있었습니다.

"어떡해? 나 여기가 다 거기 같아. 너무 길이 다 비슷비슷해. 오빠랑 같이 왔을 땐 분명 알 것 같았는데."
"침착해. 주위를 둘러봐. 뭐가 보여?"

이사할 집을 당시 함께 알아봐 주었던 남자친구가 통화를 하며 당시의 위치를 떠올리며 길 안내를 해 준 덕분에 무사히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평소 같으면 처음 가는 길이라도 곧잘 방향 감각을 곤두세워 어느 쪽으로 가야 다시 돌아가는 길인지 알 수 있었는데 남자친구와 함께 가게 되면 늘 남자친구의 손에 붙들려 길을 쫓아 가게 되더군요.

몰랐습니다. 유독, 남자친구 앞에서 어리버리해 지는지.

친구가 그 이유를 알려 주더군요.


"평소 너가 우리와 함께 다닐 때는, 너가 항상 앞장 서서 길을 안내 하곤 했잖아. 서로 수다 떠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너가 먼저 여기라며 알려 주기도 하고. 그런데, 너가 우리보다 길눈이 밝아서 우리보다 먼저 길을 찾고, 너가 우리보다 리더십이 좋아서 우리를 이끌어 안내했다기 보다는, 우리가 너와 함께 있을 때는 너에게 참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생각 없이 이야기 나누고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우리가 미리 길을 알아보고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아도 너가 분명 우리를 잘 이끌어 데리고 갈 거라는 걸 아니까, 안심했다고나 할까?"
"아, 그런가?"
"아마 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닐 때는 책임감과 네가 이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늘 앞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거겠지. 하지만, 네가 남자친구와 있을 때는 우리가 널 향해 느꼈던 것처럼 네가 남자친구를 그만큼 많이 의지하고 믿기 때문에 그런 짐을 잠시 놓아둔다고나 할까?"

집안의 한 가장으로, 맏이로, 반에서는 반장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제 위치 자체가 후배들 사이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쉽사리 내려놓지 못했던 책임감과 리더십을 남자친구를 만날 때는 내려놓기 때문에 더 어리버리해 진다는 친구의 그 말이 정말 와닿더군요.

상대방에게 흐뜨러짐을 보여선 안된다, 상대방에게 헛점이나 약점을 보여선 안된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면서까지 상대방에게 흐뜨러짐 없이, 헛점 없이, 약점을 숨겨 행동해야 한다고 잠재적으로 학습받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찌보면 참 다행이기도 하고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요. :)

+덧) 결혼을 하면, 든든한 내 편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던 선배 언니의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추가 덧!) 아마 이 포스팅을 보실 때 쯤, 전 KTX 열차 안에 있을 듯 하네요. ^^ 1박 2일로 부산에 놀러 간답니다. 휴가를 맞아 기분 전환하고 올게요. 재미난 에피소드가 생기면 잔뜩 안고 올게요. 댓글이 늦어 지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

모두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