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이성을 볼 때 한 가지 기준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일 것. 나는 성격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에, 분명 나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그 사람을 깔보거나 그 사람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런 상대방과 결혼을 하면, 결혼생활은 얼마 못갈 것이 뻔한. 지금은 멋진 한 사람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인연을 되짚어 보면 모두 하나 같이 내가 존중할 수 있는 멋진 사람들이었다.
나의 모난 부분, 부족한 부분을 메워 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 끝판왕이 지금의 내 남편이자, 내 마지막 남자친구이다.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고 근교의 쇼핑몰로 나가 식사를 했다. 식당 내 좌석에 손님이 꽉 차 있었는데 쇼핑몰 내 위치한 식당이다 보니 개방된 좌석이라 자칫 너무 가까이 붙어서 기다리면 오히려 식사하고 있는 분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조금 떨어져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활동성 많은 미취학의 남매를 데리고 대기하는 것이다 보니 어서 자리가 나길 바라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어 원서 책을 들고 있는 어느 한 남성분이 우리 앞을 새치기 하듯 서는 모습을 목격했다. 우리가 대기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을 텐데 우리가 너무 멀찌감치 서 있었던건지, 자연스레 새치기 하듯 앞서 서는 모습에 무척 당황했다.
'배울 만큼 배운 분 같은데 저러면 안되지!'
한창 활동성이 넘치는 두 아이는 언제 식당에 들어가냐며 이제 들어가면 되냐며 발을 동동 굴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 식당 내 테이블 빈 좌석이 났고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온 남성분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성큼 성큼 걸어가는 듯 했다. 아이들과 서서 기다린 시간이 억울해 쏜살같이 달려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뒤늦게 온 손님에게 어이없게 자리를 뺏길 뻔 했다며 다행이라고 신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당 입구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4명이 기다리고 있는 걸 뻔히 봤으면서 어떻게 새치기를 하려 하냐며, 속으로 그 손님을 험담하면서 말이다.
조금 뒤, 메뉴를 선택하고 주문을 하기 위해 신랑이 카운터에 갔다가 돌아오며 내게 이야기 했다.
"아무래도 우리 실수한 것 같아. 저 분 우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셨던 것 같아. 손에 진동벨이 있어. 그리고 지금 저 분 음식도 나온 것 같아."
"응? 무슨 말이야?"
이럴수가! 영어 원서 책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진동벨이 이제야 보였다. 저 손님이 새치기하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우리가 새치기를 한 셈이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테이블에도 자리가 나서 그 분이 자리를 앉았다. 뒤이어 어디론가 통화를 하는 듯 하더니 우리 아이들 또래로 보이는 세 명의 아이와 그의 아내가 테이블에 앉았다. 어쩌나. 아이 셋이 있는 아버지였다. 혼자 밥 먹으러 와서 새치기를 한 손님이 아니라, 애초 우리보다 먼저 왔었고 딸린 가족이 많다 보니 따로 먼저 와서 주문하고 빈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죄송하다고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되었다. 그 와중에 신랑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 같더니, 카운터로 가서 음료를 주문하는 듯 했다.
얼핏 뒷모습을 보니 콜라와 사이다 등 우리 가족이 먹기엔 좀 많은 양을 주문하는 듯 했다.
'난 저쪽 테이블 때문에 너무 민망하고 창피해서 음식도 제대로 안넘어갈 것 같은데, 음료는 왜저리 많이 시키는거야.'
아니나 다를까, 신랑은 주문한 음료와 컵을 가지고 직접 아까 그 손님의 테이블로 갔다.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저희가 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는 건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음료를 건네며 고개 숙여 정중하게 사과 인사를 하는 신랑의 모습에 이미 결혼한 내 남편이지만, 뿅 반했다.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신랑이 돌아 오니 두 아이는 의아해 하며 질문을 퍼부었다.
"엄마, 아빠가 저기 계신 손님들에게 잘못 한 게 있어서 사과드렸어. 자세한 건 나중에 저기 계신 손님들 가시고 나면 설명해 줄게. 지금은 밥 먹자."
"새코마, 나도 사과는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어. 식사중인데 대뜸 가서 사과하는 것도 이상한 것 같고, 식사 다 드시고 나서 나가실 때 죄송하다고 하기도 그렇다는 생각에 말이야."
"음식 주문하신 걸 보니까 음료는 주문안하신 것 같더라구. 우리 음료수 주문하면서 저 테이블 음료수도 같이 주문해서 가져다 드리면 되겠다 싶어서 가져다 드리면서 사과했지. 너무 죄송해서."
"난 영문 원서도 읽으실 정도로 배우신 분이 왜 새치기를 하실까?라고 생각했어. 그게 아니었네."
"'배우신 분' 맞지, 다만 우리보다 훨씬 더 배우신 분이었던 거지. 어찌보면 우리가 먼저 테이블에 앉았을 때, 바로 ‘내가 먼저 온거다. 비켜달라.' 라고 할 수 있는건데 아무 말 없이 그냥 묵묵히 기다리신 거니까."
신랑의 사과 방법이나 이후 그 분을 향해 우리보다 더 배우신 분이라고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내 눈은 신랑을 향해 더욱 찐 하트를 그렸다.
그리고 실제 신랑의 말처럼, 그 분은 정말 많이 배우신 분이었다. 식사를 하고 나가시면서 다시 한번 우리를 향해 ”사실 제가 이야기 하지 않으면 제가 먼저 왔는지 어떤 지 알 수 없는 거였잖아요. 덕분에 음료수 잘 먹었습니다.“라며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나가셨다. 대인배다. 덜덜.
그 분을 향해 "죄송합니다"를 연신 내뱉던 나와 신랑이 낯설었던지, 두 아이가 다시 물었다. 엄마, 아빠가 뭘 잘못했냐고, 왜 죄송하다고 하냐고 말이다. 저 분에게 큰 실례를 하였기 때문에 죄송하다고 사과 한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누군가에게 잘못했으면 엄마, 아빠도 이렇게 사과를 한다는 것을 알려주며 애초에 잘못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혹여 잘못을 했으면 바로 사과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배운 사람과 배운 사람이 만나니 자칫 감정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일도 이렇게 젠틀하게 해결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난 그 상황에서 신랑처럼 즉각적으로 사과할 수 있었을까.
속으로 어머, 어떡해… 내가 실수했네… 민망하다… 창피하다… 어떻게 사과하지? 고민만 하다가 어영부영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을까. 나에게 없는 신랑의 그러한 용기에 다시금 무한한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또 한 번, 나의 배우자 선택 기준에 나 스스로 감탄을 하며... 역시 난 나보다 나은 사람, 나보다 배운 사람,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맞았던 거다. 내가 그만큼 부족한 사람이니 말이다. 세상에는 멋진 사람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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