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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 특징 우리 아이를 마마보이로 키우고 싶지 않다면 꼭 알아야 할 것

· 댓글개 · 버섯공주

맞벌이를 하다 보니 퇴근 후,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하면 저녁 8시는 훌쩍 넘곤 한다. 아이들을 하원 시켜 주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이들이 안쓰럽다며 종종 저녁을 미리 챙겨 주시곤 한다. 감사하게도...

최대한 외식은 자제하고 집에서 밥을 먹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과정에서 양가 도움을 많이 받는다. 거리가 가까워 종종 필요한 밑반찬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함께 만나 식사를 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가 마늘장아찌, 파김치, 소고기 장조림 등을 챙겨 주셨다. 그렇게 종종 받아 오는 밑반찬과 함께 차곡차곡 쌓이던 반찬 그릇.

어머니의 집에 있어야 할 반찬 그릇이 반찬과 함께 모두 우리 집으로 오니 정작 어머니가 쓰셔야 할 반찬 그릇이 없겠다 싶었다. 집에 굴러 다니던 큼지막한 부직포백에 차곡차곡 담아 차 트렁크에 실어 어머니께 돌려 드렸다. 빈 그릇으로 돌려 드리면 안 되는데, 빈 그릇으로 돌려 드리려니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반찬 그릇을 잘 돌려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친정집에 놀러 갔을 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 조곤조곤 이야기 해 주셨다.

"전에 너가 돌려줬던 엄마 반찬 그릇 있잖아."
"네."
"그거 다 깨졌더라구."
"헉!"
"아무래도 트렁크에서 반찬 그릇끼리 서로 부딪혀서 깨졌나 봐."
"아! 아까워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깨졌어요?"
"응. 그렇더라고."
"아, 깨질 줄 몰랐네."
"겉으로 봤을 땐 유리가 두꺼워 보였지? 생각보다 유리가 약해."

역시! 여전히! 어머니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로 된 반찬 그릇이 여러 개가 깨졌는데 너무나도 조곤조곤하게 사실만 전달하신다.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깨뜨린 반찬 그릇보다 더 좋은 반찬 그릇을 사 드려야겠다고.

사실전달

아이에게 사실보다 감정 전달에 집중하면 생기는 문제점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항상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사실만을 전달하셨고 본인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으셨다. 예를 들어 소중하게 아끼던 어머니의 물건이 깨졌을 때도 '아, 이게 깨졌구나. 넌 다치진 않았어? 괜찮아?' 철저하게 깨진 물건 그 사실에만 초점이 맞춰져서 정말 어머니께서 소중히 여기신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사실 전달에만 집중하셨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아쉬워하는 감정을 담지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속상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알기 전에, 나 스스로 먼저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이건 다룰 때 조심해야겠다-라고. 반대로 나의 부모님이 상당히 감정적인 분이셨다면, 내가 문제점을 인식하기 전에 속상해하는 부모님의 감정에만 온 신경을 쏟았을 거다. 내가 저걸 깨뜨려서 부모님이 많이 속상해하시는구나- 여기에 모든 온 신경과 감정이 집중하는 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지 못하고.

어머니가 감정을 표현하시는 때가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거나 귀여운 동물을 보았을 때. 어머니가 어떤 것을 보고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게 뭔지 싫어하시는 게 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깨지거나 잃어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대해서는 절대 본인의 감정을 담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학창기 시절 부모역할은 중요하다
학창기 시절 부모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한참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친엄마와 잠시 떨어져 새엄마와 함께 살았던 짧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새엄마와 친엄마와의 두드러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데렐라' 동화 속 새엄마처럼 구박을 하고 괴롭히는 나쁜 새엄마인가 여부를 떠나, 새엄마는 사실 전달보다 본인의 감정 전달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친엄마와 정반대였다.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깨뜨렸다. 열다섯 살 중학생 여자 아이가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손에 그릇이 미끄러져 깨뜨렸는데 그 상황에서 새엄마가 내뱉은 첫마디는 "너 일부러 깨뜨렸지?"였다. "설거지하기 싫으면 말로 해. 그릇 깨뜨리지 말고." 그 말에 무척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어? 그릇이 깨졌네." "그릇이 깨졌구나."라는 사실 전달이 아닌, 매사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이후로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사실 전달보다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담아 이야기를 하니, 매사 긍정적이었던 내가 조금씩 부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뭔가를 하려다가도 부정적인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그 전에는 알 수 없었던 하나의 큰 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주도적이었던 나는 수동적으로 변화되었다. 겁 없이 이것저것 도전하던 내가 철저하게 시키는 것만 겨우 마지못해 하려고 하는 것이다. 시킨 것만 철저하게 하려고 하고,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는 것. 왜? 해 봤자,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이다.

마마보이특징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사실 전달 VS 감정 전가, 나는 어떤 부모인가?

사실에 기반해서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스스로 상황을 곱씹고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전달보다 본인의 감정을 담아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면 상황에 대한 생각보다 다음부터는 저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먼저 생각한다.

"90점을 받았구나. 시험 치르느라 수고했어. 최선을 다 했나 보구나."
→ 부모님은 내가 최선을 다 한 것에 의의를 두시는구나. 다음에도 최선을 다 해야겠다.

"지난번엔 100점이더니, 이번엔 90점이야? (한숨) 휴."
→ 부모님은 높은 점수가 아니면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 성적표를 보여드리지 않는 게 낫겠어.

"어? 이게 깨졌구나. 이게 생각보다 약하네."
→ 아, 저게 깨지기 쉬운 약한 것이었구나. 비슷한 걸 다룰 땐 조심해야겠다.

"이게 얼마 짜리인지 알아? 네가 깨뜨려서 이거 또 사야 되잖아."
→ 저건 비싼 것이었구나. 비싼 걸 깨뜨려서 저 사람이 화가 났구나.

양육권 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새엄마, 아버지와 잠깐 살았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온갖 부정적인 기운을 다 받았던 것 같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순 없다는 생각에 홀로 계시던 어머니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물리적 환경은 훨씬 나빠졌으나, 심적으로 느끼는 안정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파이팅이 넘쳤다. 어머니는 홀로 돈벌이를 하시면서 이른 아침에 나가 저녁에 퇴근하며 두 딸을 키우셨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보슬보슬 갓 지은 밥과 따뜻한 국과 반찬을 아침밥으로 준비해 주셨다. 단 한 번도 어머니는 힘들다는 투정을 두 딸에게 하지 않으셨다. 새벽같이 매일 일어나 아침밥을 하시고 출근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저게 뭐야. 축복아, 행복아. 장난감 가지고 놀았으면 제자리에 둬야지. (엄마 힘든데, 엄마 더 힘들게 할 거야?)"

단 한 번도 어머니는 힘든 내색을 하신 적이 없는데 나는 어머니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뒤에 덧붙인 '엄마 힘든데...'라는 표현은 하지 않는 게 나았는데 말이다. 늘 사실만을 전달하셨던 어머니의 언사를 배우고 싶으나 쉽지 않다.

"엄마는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떻게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주며 홀로 두 아이를 키웠지? 퇴근하면 또 아이들 저녁 챙겨주고. 다음날 또 새벽같이 일어나고."

어머니의 새벽녘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딸은 알아서 설거지와 청소를 도우려 애썼고, 학업에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전념했다. 만약 어머니가 매일 푸념에 잔소리를 하시는 분이었다면 과연 동생과 내가 능동적으로 알아서 움직이려 했을까?

마마보이 특징
마마보이와 주도적인 아이는 한 끗 차이

마마보이와 주도적인 아이는 한 끗 차이

부모의 기분에 맞춰 주기 위해 거짓말하거나 허풍 치는 자식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능동적인 자식으로 키우고 싶다. 그러려면 그 첫 번째 조건이 부모의 기분을 자식에게 전가시켜선 안 된다. 아이들이 어떤 실수를 저질러 나의 감정이 상했다고 하더라도 그 감정을 아이들이 알아주길 바래서는 안된다. 자신의 감정을 그때 그 때 표출해서 자식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그 상황 속에서 감정을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수동적인 아이들이 아닌,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아이가 될 수 있다. 

마마보이와 주도적인 아이는 한 끗 차이
마마보이가 아닌 주도적인 아이로 성장하길

내 품 안의 자식으로 키우고 싶다면 자식에게 자신의 감정을 꾸준히 전가시키는 것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고, 반대로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자식으로 키우고 싶다면 자식에게 사실을 기반으로 꾸준히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다. 마마보이나 마마걸이 왜 요즘 부쩍 많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모가 먼저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라기를 바란다면... 감정을 아이에게 전가하지 말자. (나에게 하는 말이다. 되뇌고 또 되뇌고. 조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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