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가 왜?"
"난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
"그래?"
20대 초반, 일찍이 현실적이었던 나에게 그가 던진 질문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 하지만 나와 달리, '목숨을 버릴 수 있다.' 는 그의 단호한 대답에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용기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난 농담으로라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구나'라는 생각에 감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의 그러한 대답은 여자를 현혹하기 위한 달달한 멘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 했지만,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애'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멘트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이었다.
당장의 연애를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어!
그럼 그렇지.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사람이라니...
실제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말을 그리 쉽게 내뱉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첫사랑이자, 첫 연애상대였던 그를 머리속과 마음속에서 지웠다.
어린 두 자식을 두고도 바람이 난 아버지의 영향을 받다 보니 제 아무리 멋지고 성실한 남자라 하더라도 '남자에게 바람둥이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 잡혀 있었다. 그런 내게 다시금 '남자의 바람은 본능이야!' 라는 결론을 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첫사랑의 아픈 기억.
"너도 결국 바람 피울거잖아!"
이후에도 상대 이성을 만나다 보면 '신뢰' 이전에 '불신'이 먼저 싹텄다.
"너도 남자잖아. 어차피 나랑 만나다가 다른 여자가 눈에 띄면 바람 피울거잖아."
"만약 바람 피우게 된다면, 제발 나한테 들키기 전에 먼저 말해줄래?"
신뢰가 없는 만남이 오래 갈 리 없는 것은 당연지사.
거기다 신뢰가 없다 못해 툭하면 비아냥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니 상대방 또한 그런 나의 모습에 질릴 법도 하다.
이상하게도 지금의 남자친구는 당시 나의 그런 모습에 질려하기는 커녕 그런 말을 하는 내게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맞아. 남자 본능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본능 따라 살면 그게 사람이야? 동물이지? 넌 당장 배고프다고 길거리 가게에 들어가서 음식 훔치니? 난 아닌데... "
남자가 여러 여자를 욕심내고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해 본능이다, 아니다의 여부를 떠나 본능이건 아니건 그렇게 살면 그게 사람이냐고, 그게 옳은 행동이냐고 되묻는 남자친구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대답은 뻔하니 말이다.
그러다 오빠는 연애를 많이 해 보지 않아서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라며 괜한 주절이를 늘어 놓았다. 그런 내게 다시금 남자친구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해주었다.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은 연애에 있어선 분명 선수일지 모르지. 그런데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 사랑을 많이 해 본 걸까? 연애만 하며 살래? 차라리 난 단 한번이라도 진심 어린 사랑 한번 하고 말래. 난 지금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건데. 넌 그렇지 않아?"
남자친구의 '연애'가 아닌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 '연애'를 위해 날 만나는 것이 아닌, '사랑'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라는 말.
맞다. 그간 난 '연애' 타령만 하고 있었다. '사랑'이 싹터야 '연애'가 되는 건데, '연애'에 목적을 둔 '연애'를 하고 있었던 거다.
남자친구의 '우리, 연애를 위한 연애가 아닌 사랑을 하자.'는 말은 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결 같이 지켜오고 있다. 아마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다 그렇지 뭐.' 라는 편견에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채, '연애'를 위한 '연애'만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외로워 죽겠으니 누구든 빨리 붙잡고 연애를 해야 겠다는 친구.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돈 있는 남자면 아무나와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친구.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내가 발끈해선 "아냐! 사랑을 해야 된다니까!" 라는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니 '사랑'이 아닌, '연애' 타령만 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새삼 내 삶과 내 남자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하게 된다. 내 평생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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