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쉬는 날엔 연락이 잘 안돼."
"이상하다? 왜 연락이 안되지? 너 여자친구, 양다리 아니야? 아님, 어장관리? 혹시 모르니까 잘 알아봐."
"무슨… 설마."
연애초기, 남자친구의 가장 큰 불만은 다름 아닌 집으로만 가면 연락이 되지 않는 저의 행동이었습니다. 실제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만 돌아가면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제때 회신해 주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말이죠. 만약 통화를 우연찮게 하게 되더라도 '냥냥'거리던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변해 있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남자친구가 머뭇거리며 묻더군요. 남자는 '여자친구의 연락에 쿨하다. 그러니 괜찮다.'는 말도 안되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그때에야 알았어요. 그간 집으로만 가면 연락이 잘 안되던 저로 인해 남자친구는 알게 모르게 속을 끓이고 있었나 봅니다.
"왜 연락이 안되는거야? 데이트 하고 나서 너가 집으로만 가면 연락이 안되잖아. 솔직히 말해줘."
집에서 무뚝뚝한 장녀로 커왔습니다. 단 한번도 부모님께 누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 한 적도 없고,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며 집으로 데려 온적도 없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도록 그리고 직장인이 되도록 집안에선 연애 한번도 못해본 숙맥으로 통한거죠. 남자라곤 전혀 모르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_+
"응. 받으면 되지. 그런데…"
"뭐가 문제야?"
"내가 문제야."
무뚝뚝하기만 하고 사근사근한 성격이 결코 아닌 저에겐 집안에서 남자친구와 반갑게 통화하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기란 너무나도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남자친구 앞에서 제 목소리가 바뀌고 행동이 바뀌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데 그런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기 민망했던거죠.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이기 전에 가족에게 자연스레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고민도 많았고요. 어쩌다 가족과 TV를 보고 있다가 남자친구에게 전화오면 평소의 하이톤이 아닌 중저음으로 목소리를 깔고 차분하게 통화를 하곤 했습니다.
"집에서 몰라? 남자친구 있는거?"
집에서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전화 받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자, 남자친구가 펄펄 뛰었습니다. 무척이나 속상해 하는 모습도 역력했고요. 남자친구는 저와 반대로 저와 사귄지 3개월 정도 지나 가족에게 바로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저와 함께 처음으로 맞이하던 100일 기념일엔 저에게 어떤 선물을 해주는 게 좋을지 부모님과 이야기하고 고민했다는 말에도 무척 놀랬습니다.
100일 기념일엔 어떤 선물을...?
'아! 다르구나!' 라는 생각이 확 들더라고요. 연애 초기엔 이처럼 서로 자라온 집안 분위기가 달라 애를 먹었습니다. 남녀 차이의 벽을 넘는 것도 어려운데 서로 다른 집안 분위기로 이 사랑을 오래 유지하기 힘든게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데이트를 하며 서로가 집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집안 분위기는 어떤지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때에야 '아, 그 상황에선 그러그러했기 때문에 통화하기 힘들었구나.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남자친구니 그럴수도 있겠구나.' 라고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지금쯤은 아버님이 돌아오실 시간일테니 나중에 전화해야 겠구나.' '남자친구가 지금쯤 가족과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고 있겠구나.' 와 같이 집안 분위기와 생활패턴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니 더 좋더라고요.
요즘에도 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다가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조심스레 제 방으로 들어가 소곤소곤 전화를 받곤 합니다. 물론,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음에도 말이죠.
서로의 자라온 집안 분위기가 다르고, 서로의 익숙해진 생활패턴이 있는데 그것을 한번에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번에 바꾸기 보다는 서로가 좀 더 배려하며 맞춰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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