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것 자체를 즐기는 저와 달리 남자친구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저와 달리 남자친구는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 남자친구와 다툼이 있을 때면 화해의 의미로 제게 편지를 써 달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습니다. 아마 남자친구 입장에서 꽤나 곤혹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손으로 쓰는 편지가 그렇게 좋아서, 남자친구에게 반강제로 편지를 써달라고 보채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삐쳤어?]
[아니]
[에이, 솔직하게 말해봐. 왜 그래?]
[아니. 사실은 말이야.]
메신저에 그녀의 표정이 보인다. 평소 메신저에서 단답식으로 짧게 이야기 하던 그녀도 급 흥분하여 한번에 세줄, 다섯 줄씩의 텍스트를 평소의 두 세배 속도로 빠르게 써내려 간다.
하아. 분명! 손이 보이지 않을 거다. 흥분이 아니라 광분인지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르게 타이핑 할 수 있을까. 평소 400 타수인 그녀가 흥분하면 800타수 넘어가는 건 예사다.
[그래서 그랬다구.]
[…]
[왜 대답이 없어?]
[아, 미안. 스크롤 압박. 기다려. 일단, 다 읽고.]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미 그녀의 타이핑 속도에 밀려 버린다. 큰일이다. 말로 해도 지고, 메신저에서도 진다. 그래도 이럴 땐 일단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게 상책이다.
[만나서 이야기 하자]
[그래]
벌써부터 고민된다. 어떻게 풀어 줄까. 어떻게 말하면 빨리 기분이 풀어 질까.
멀찌감치서 이미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못 본 척 한다.
그래도 예전 같음 잡아 먹을 듯 노려보더니 이제는 그렇게 노려 보지도 않는다. 아니, 예전 같음 어떤 말에도 묵묵부답 아무 말이 없더니 이제는 먼저 말을 건넨다.
"어떻게 버섯 기분 빨리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왔지."
"진짜?"
"응. 넌 무슨 생각했는데?"
"못돼가지곤…"
"하하하. 내 욕은 안 했어?"
"응. 내가 오빠 욕을 왜 해?"
"그렇지? 가자. 밥 먹으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네가 틀렸다, 내가 맞다' 몇 번씩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고 나서야 끝이 보이던 다툼이 언제부턴가 다툼이 다툼이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저 얼굴 한 번 볼 것을 얼굴 두 번 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 넘겨 버린다.
미안하다는 말 보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더 환하게 웃는 걸 보면 정말 순진해 보인다. 아니, 분명 순진한 척 하는 거다. 독할 땐 얼마나 독한데. 뭐, 그게 매력이기도 하다만.
내 여자친구지만 밥은 정말 잘 먹는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순간이 이리도 가까이 왔음을 느끼니 새삼 시간의 빠름을 느낀다.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남편이고 싶고, 아버지이고 싶지만 지금 내 앞에 놓여진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 하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이전에 집안의 가장으로 부모님을 생각해야 하는 아들이라는 책임감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일까.
요즘 부쩍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연애 초기만 해도 '결혼'이라는 말만 꺼내도 쌀쌀하게 반응하던 그녀이건만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버섯이 그리고 있는 나와의 결혼생활은 어떤 그림일까. 내가 그리고 있는 이 그림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흰 드레스와 까만 턱시도로 언젠가 함께 나란히 서게 되는 그 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지 사뭇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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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2년전 남자자친구의 편지 재미나게 보고 갑니다.
좋은 오후 되세요.ㅎㅎ^^
Reply:
사용자 버섯공주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감사합니다. 해바라기님.
이전부터 글 속에 담겨진 남친분을 보면 참 꼼꼼하면서 새심한 배려심이 담겨져 있다는걸 느낄수가 있는데...그 속과 다르게 가끔은 무뚝뚝한 남친의 모습도 사랑으로 감싸 주시면 더 좋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실꺼라 봅니다...^^
이쁘게 아름답게 2010년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만드세요^^
Reply:
사용자 버섯공주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새라새님의 말씀 기억할게요! ^^
달콤하고 씁쓸한
과정을 모두 겪고
아직도 애틋해 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편지가 좋은게
어느 한 시점에 나와 연인의 생각을 담아 놓는다는게
나중에 둘의 관계에 도움이되기도 하는듯 보이네요.
아무래도 조만간 날 잡으실 분위긴데요. ㅎㅎ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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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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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버섯공주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헉. 휘둘리시면 안돼요. ㅠ_ㅠ
한번 감정에 휩싸이면...
에구.
언제던가 꽤 오래전에 제친구가 편지를 노트에 썼던 기억인데
그걸로 편지를 장황 하게 써서 주는데 7장이던가 그 랬어요
늘 동갑 나기라서 별 관심도 없엇는데
어느해 이사온후 정리 하다가 발견된 그 편지
이미 낡고 나달 나달 해버린
편지는 힘든 나날 제게 많은 위안이 된 편지였는데
어느날 그게 사라 졌어요 ㅎㅎ
며느리도 모름 ㅎㅎ미스터리 ㅎ
예전편지라... 저도 서랍 속 고이 모셔둔 편지가 있는데..
남자친구 군대 보냈을때부터 지금까지~ 라고해야하나..ㅎ
암튼 꺼내보면 꽤 쑥스러울것 같아요^^;;
나 삐졌다고! 빨리 풀어달라고!
하하 저도 항상 속으로 외치는 말ㅎㅎㅎ
재미있네요.
글쓰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글을 꽤 잘 쓰시는거 같아요. 조금 다듬으면 소설 쓰셔도 될 듯.
Reply:
사용자 버섯공주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레즈님 말씀에 힘입어 소설이나 써볼까요? (응?) ㅎㅎㅎ
다듬는 건 레즈님이 좀 해 주시면... (응?) ㅎㅎㅎ
이런게 다 추억이 아닌가 싶어요...
나중에 십년이 지나서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듯해요 ㅎㅎ
예쁘고 부럽고 좋습니다^^ 버섯님 항상 예쁜 사랑하는 것 같아서 부러워요~^^
저도 연애할 때 편지 모아놓곤 하는데, 나중에 보면 참 재미있죠 ㅎ
인연이 아니게 된 분들것도 있는데, 손으로 쓴 편지들은 참 버리기가
힘들더라구요 ㅠ
저도 몇달전 남자친구한테 받았던 편지를 읽어봤는데요...
그때보단 확실히 우리 사이가 많이 편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다시 예전의 풋풋함도 생각해볼수 있었던 계기가 됐어요~
한번씩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ㅋ
부러우면 지는건데.. 부러우면 지는건데..
난 부럽지 않아 ㅠㅠ 나도 이제 사랑을 시작하고 있으니 ㅡㅡㅋ
저는 2년전 만들었던 UCC 동영상이 생각나네요..
버섯공부님 좋으시겠어요;; 쳇 ㅠㅠ
정말 따뜻하고 귀여운 편지네요 ^^
왠지 사랑이 깊어져가는게 느껴지는 대화에요.
버섯공주님 글의 매력이랄까요 ㅎㅎ
올빼미의 표정이 정말 삐진듯한것은
제착각인가요 ㅎㅎ
남자친구분이 정말 많이 사랑하시는듯합니다.
ㅋㅋ 그래도 좋으시겠어요~
이성친구라도 있어서..ㅎㅋ
식성이 비슷하다는것
아주 중요할것 같아요.^^
사랑다툼 잘 보고 갑니다.ㅎ
ㅎㅎㅎ버섯공주님께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글이네요^^
남자친구분께서 참 많이 아껴주고계신가 봅니다~
그런데 남자친구분의 편지를 토대로 재구성한 이야기라고 해도,
공주님 글쏨씨가 참 좋으신것 같습니다.
Reply:
사용자 버섯공주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우왓. 칭찬해 주시니 몸둘바를.
^^
감사합니다.
우와진짜부러워요ㅠㅠ
난내가삐지면매일대화명왜저러냐고만하고
지때문에삐진거알면서풀어주지도안는데ㅠㅠ
우와머싯따진짜ㅠㅠ
삐져쓸때나도편지써달라고해봐야겟어요!ㅎ
오래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