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남자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니

글 쓰는 것 자체를 즐기는 저와 달리 남자친구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저와 달리 남자친구는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 남자친구와 다툼이 있을 때면 화해의 의미로 제게 편지를 써 달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습니다. 아마 남자친구 입장에서 꽤나 곤혹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손으로 쓰는 편지가 그렇게 좋아서, 남자친구에게 반강제로 편지를 써달라고 보채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2년 전 남자친구에게 받은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 보니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뭔가 새롭기도 합니다. 그 편지 내용을 토대로 당시 남자친구의 마음을 재구성해 봤습니다.


[삐쳤어?]
[아니]
[에이, 솔직하게 말해봐. 왜 그래?]
[아니. 사실은 말이야.]

메신저에 그녀의 표정이 보인다. 평소 메신저에서 단답식으로 짧게 이야기 하던 그녀도 급 흥분하여 한번에 세줄, 다섯 줄씩의 텍스트를 평소의 두 세배 속도로 빠르게 써내려 간다.

하아. 분명! 손이 보이지 않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르게 타이핑 할 수 있을까. 평소 400 타수인 그녀가 흥분하면 800타수 넘어가는 건 예사다. 

흥분이 아니라 광분인지도...

열심히 올라가는 메신저 창의 스크롤 바를 붙잡으며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노력해 보지만 역시, GG다.

[그래서 그랬다구.]
[…]
[왜 대답이 없어?]
[아, 미안. 스크롤 압박. 기다려. 일단, 다 읽고.]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미 그녀의 타이핑 속도에 밀려 버린다. 큰일이다. 말로 해도 지고, 메신저에서도 진다. 그래도 이럴 땐 일단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게 상책이다.

[만나서 이야기 하자]
[그래]

벌써부터 고민된다. 어떻게 풀어 줄까. 어떻게 말하면 빨리 기분이 풀어 질까.

멀찌감치서 이미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못 본 척 한다.

삐친 게 아니라, 삐친 척 하는 건 이제 딱 보면 척이다. 

그래도 예전 같음 잡아 먹을 듯 노려보더니 이제는 그렇게 노려 보지도 않는다. 아니, 예전 같음 어떤 말에도 묵묵부답 아무 말이 없더니 이제는 먼저 말을 건넨다.

"오면서 무슨 생각했어?"
"어떻게 버섯 기분 빨리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왔지."
"진짜?"
"응. 넌 무슨 생각했는데?"
"못돼가지곤…"
"하하하. 내 욕은 안 했어?"
"응. 내가 오빠 욕을 왜 해?"
"그렇지? 가자. 밥 먹으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네가 틀렸다, 내가 맞다' 몇 번씩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고 나서야 끝이 보이던 다툼이 언제부턴가 다툼이 다툼이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저 얼굴 한 번 볼 것을 얼굴 두 번 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 넘겨 버린다.

미안하다는 말 보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더 환하게 웃는 걸 보면 정말 순진해 보인다. 아니, 분명 순진한 척 하는 거다. 독할 땐 얼마나 독한데. 뭐, 그게 매력이기도 하다만.

내 여자친구지만 밥은 정말 잘 먹는다.

이런 저런 반찬 투정 없이. 나와 식성이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큰일이기도 하다. 분명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나와 여자친구를 꼭 닮은 아이가 나올 거다. 적어도 식성은 둘 중 하나를 닮는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잘 먹을 텐데.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는 것을 그려 보곤 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순간이 이리도 가까이 왔음을 느끼니 새삼 시간의 빠름을 느낀다.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남편이고 싶고, 아버지이고 싶지만 지금 내 앞에 놓여진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 하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이전에 집안의 가장으로 부모님을 생각해야 하는 아들이라는 책임감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일까.

요즘 부쩍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연애 초기만 해도 '결혼'이라는 말만 꺼내도 쌀쌀하게 반응하던 그녀이건만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레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오빠, 우리 결혼하면..."

버섯이 그리고 있는 나와의 결혼생활은 어떤 그림일까. 내가 그리고 있는 이 그림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흰 드레스와 까만 턱시도로 언젠가 함께 나란히 서게 되는 그 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지 사뭇 궁금해 진다.  

+ 덧) 지나고 나서 남자친구의 시각에서 편지를 다시 읽어 보니 왜 이리 웃기기만 할까요.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 말대로 제가 급 흥분하면 말이 빨라지고, 타이핑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지는 듯 합니다. 하하. -_-;;; (저만 그런거 아니죠? 그쵸?;;;)